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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읍에서 목포방면으로 18km 떨어진 삼향면 왕산리는 초의선사의 출생지로 격동하는 조선후기 침체된 당시의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승으로, 근근히 그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이었으며,깊고도 명징한 시ㆍ서ㆍ화를 남긴 한국문화에 깊이 각인된 초의선사가 지난 97년 5월 문화인물로 선정된 계기로 현창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생가, 추모각을 복원하고 기념전시관 등을 건립하고 있다.

 

초의선사 기념관 홈페이지

 

 

초의(草衣 1786 ~ 1866) 속가명 장의순(張意恂)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 10년인 1786년 4월 5일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년간 수행하면서 선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으로서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밖에도 시ㆍ서ㆍ화에 능통하여 5절이라 일컬어 지고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등 당대 최고의 거유 석학들과 깊은 교유를 통하여 도교는 물론 유교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초의스님은 1786년 4월 5일(음) 전남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 (全南 務安郡 三鄕面 石峴里)에서
인동 장삼천(仁同 張三阡)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세때 출가,
운흥사(雲興寺 나주군 다도면 덕용산)벽봉선사(碧峰禪師)로부터 수계(受戒)하였고,
19세때 영암 월출산(月出山)에서 상봉에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크게 느꼈다고 한다.
22세때 쌍봉사(梔峰寺)에서 토굴생활,
24세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과 백련사(白蓮寺)에서 초대면했고
30세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과 서울에서 초대면, 이 세분이 이후 오고 간
시서화차(詩書畵茶)에 얽힌 인연은 선비 세계의 격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32세때 불국사(佛國寺)에서 득도(得道).
41세때 일지암(一枝庵) 결암.
45세때 다신전(茶神傳) 정서(正書).
48세때 추사선생 아버지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 선생 일지암 심방.
50세때 소치 허유(小痴 許維룡선생이 찾아와 사사(師事 당시 27세). 일지암에서 수업했다.
초의스님과 소치 선생의 이 인연?다음에 추사선생에게 이어져 화가로서
대성 운림산방(雲林山房) 4대에 걸친 도도한 화맥의 원천 구실을 했다.
52세때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성서격인 동다송(東茶頌) 저술.
55세때 추사선생이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자 그곳까지 세 차례나 찾아갔다.
56세때 추사의 유배지에서 쓴 글씨 일로향실(一爐香室)을 소치편에 보내왔는데
이 글씨는 현재 해남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각(刻)이 되어 걸려있다.
58세때 고향인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에 들렀고 이 감회를 시(歸故鄕)로 읊었다.
71세때 천상천하 둘도 없는 벗 추사 별세.
나이도 같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눈물겹도록 뜨거웠다.
81세때 8월 2일(음) 일지암에서 입적(入寂)하였다.